책을 읽을 수 없는 교생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28 Posted by 아현(我峴)
책을 읽을 수 없는 교생

一北面 文明里의 化民 林受相

삼가 말씀드리는 절박하고 지극히 원통한 사연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의 본관은 나주로서 저의 가문에서는 대대로 관리를 배출하여 10세조는 광주부윤을 지냈으며 9세조는 5道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8세조는 무주부사로 임진왜란 당시에 倡義하여 좌승지에 증직되었습니다. 7세조는 좌랑을 역임하고 호를 月窓이라 하였습니다. 대대로 나주에서 살다가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道內의 巨儒로 鄕試에 합격하자 중년에 본읍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가문의 世德이 혁혁하고 文翰이 뛰어나 제가 누구의 후손인지를 이 고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도내의 사람조차 공히 다 압니다.

아아! 그러나 가문의 운세가 기울어 아버지의 상을 당한 이후로 저는 우매하고 배우지 못한데다 家勢가 또 貧寒하여 땅을 갈아먹는 농민이 되었으나 읍내와 촌을 막론하고 제가 누구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가을에 현재의 校任이 저에게 어떤 혐의를 두고 있었는지 저의 세력없고 무식함을 깔보아 저의 조카를 校生으로 차출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이 법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처사가 있단 말입니까? 분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떨립니다. 그래서 족보 한 권과 호적 및 돌아가신 아버지의 향시 답안지 초록을 근거자료로 제시하고 명분을 중시하며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수령님께 피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하소연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통촉하신 후 특별히 임용묵 이름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교생의 역을 빼어주시도록 엄한 제사를 내리셔서 저의 조상과 자손들이 교임으로부터 받았던 수모를 씻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천만번 바라옵니다.

명령하옵실 일입니다.
성주님께 처분해 주실 일입니다.

(처분) 가문의 지체가 족보에 상세히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시권을 살펴보니 그 죽은 아버지는 도내의 거유이다. 하물며 임용묵은 향시 합격자의 자손이니 교생의 임무를 특별히 빼어주도록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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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내용은 고종 29년(1897)에 전라도 금구현 일북면 문명리에 살고 있던 임수상이 같은 고을에 제출한 문서이다. 그러나 의문이 있다. 문서를 읽어보면 교생이 된 것이 억울하니 교생의 문서에서 빼 달라고 한다. 교생이면 향교의 학생인데 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향교에 변화가 생기는데 가장 큰 것은 바로 군역자의 부족에 따른 교생의 낙강충군이다. 낙강충군이란 교생들 중에서 책을 읽지 못하는 학생들을 가려내어 이들은 군역자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결국 양반출신이라도 향교에 입학하여 책을 읽지 못하게 되면 군역을 져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향교 내에서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안정복이 지은 <목천현지> 향교 항목을 보면 儒生은 사림 중에서 선발하여 동재에 거처하고, 校生은 양민 중에서 선발하여 향교 내에서 맡은 역을 담당하고 서재에 거처한다고 되어 있다. 즉 향교 안에서도 동재와 서재로 나누어 동재에는 양반이, 서재에는 양반 이외의 사람들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럼 교생이 맡은 역이란 무엇인가. 사직단과 여단 등에서 지내는 공적인 제사와 객사에서 지내는 삭망례 등 각종 의례를 주관하고 또 고을에 왕래하는 사객들을 영송하는 일의 뒷바라지가 있었다. 또한 죄인들을 용서하는 사문을 널리 반포하는 일도 교생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교생들은 공식적은 의식에 대한 주관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본분인 학업은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즉 유생이 아닌 교생에 차정된다는 것은 양반이라는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오히려 군역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양반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임수상은 그의 조카를 교생에서 빼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출처 : 전경목, “조선후기의 교생-책을 읽을 수 없는 향교의 생도”, <고문서연구> 33, 2008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