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양반의 고향인식과 거주지선택

조선시대의 친족에 대한 구조의 변화는 17세기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양계적 복합 가족제도가 부계적 단일가족제도로 바뀐다고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는 또한 중국식 종법제도로의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친영제에 기초한 시집살이,  남녀균분상속에서 남자우대상속으로, 남녀윤회봉사에서 장자단독봉사로, 종법에 따른 입양제도 나타납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동안에는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심화, 실천 의지의 강화라는 사상적인 요인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상적인 원인 이외에 경제적, 사회적 현상들도 아울러 살펴봄으로써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에 17세기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조선전기에는 지식인들이 고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이 정착하게된 곳은 어느지역이었는가를 알아봄으로써 어느정도의 유추가 가능한지 설명해보려합니다.

지식인의 고향관을 보기 위해서 한사람은 훈구관료로 한사람은 사림관료를 나누어 살펴봅시다. 훈구관료 중에서는 서거정(1420~1488)이 있습니다. 그는 당대의 대표적인 훈구대신으로 고향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경주 자인현은 친향, 전주부는 처향, 임진현과 장단부는 외향, 그리고 대구부는 본관지, 선산부는 장인의 본관지, 안동부는 외조부의 본관지였습니다. 이 모두는 그는 고향으로 인식하였고 실재로 이 모든 지역의 경재소 당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 광주 경재소의 당상도 역임한 사실이 있는데 그곳은 가까운 친인척의 연고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8향을 최대한의 고향으로 인식하였으니 지금하고는 많이 다른 고향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림계의 경우 김종직(1431~1492)을 들수 있습니다. 그는 서거정과는 달리 3곳을 고향으로 인식하였는데, 선산부는 친향, 밀양부는 외향, 김산현은 처향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그가 선택한 목적지는 처향인 김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본가보다 처가의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외향인 밀양으로 돌아오고 마는데 그의 처가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후손의 고향도 밀양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처럼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개 최종 고향을 처향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친향이나 외향을 두루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결국 정서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을 꼼꼼히 따저 보아야만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계양의 경우 안동 주촌에 거주하면서 인근의 온계라는 지역을 발견하게 되고 이곳에 농장을 설치하여 이후 그의 가계는 탄탄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이황과 같은 고위관료를 배출하여 경상도 최대의 명문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15~16세기에 농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데, 수전농법이 급진전되고 농업생산성이 크게 향산되어 지식인들 또한 이런 지역을 거주지로 선호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읍치지역보다는 되도록 외곽지역으로, 밭농사지역보다는 논농사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읍치지역과 밭농사지역은 더 이상 지식인들이 거주하지 않은 낙후지역이 됩니다. 경상도의 명촌들을 보면 15세기의 명촌은 대개 입치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지역에서 과거합격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16세기의 명촌들은 대개가 계곡을 중심으로하는 논농사지역이었습니다. 16세기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한 명촌은 대부분이 이들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상적 요인과 관련해서 성리학적 삶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지식인들의 증가도 중요한 변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의 읍치외곽의 논농사지대로의 이동과 성리학적 지식인의 증가는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논농사의 급진전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15세기였으며 그에 따른 지식인의 외곽으로의 이동도 15세기 후반쯤 완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족보의 편찬과 종족 활동의 단초가 마련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6세기가 되면 지식인의 고향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조선후기적인 고향관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처향과 외향은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고향으로 그 지휘가 내려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후기적인 시각으로 조선전기의 사회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다르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의 모습으로 조선전기를 살펴보면 오해의 소지가 많게 되며 분명 다른 사회라는 것을 어렴풋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조선시대를 바라보는 방법에도 각각 그 시대상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주셨으면 합니다.

출처 : 김성우, "15,16세기 사족층의 고향 인식과 거주지 선택 전략-경상도 선산을 중심으로", <역사학보> 198, 2008.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