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에 대한 생각들

사편(史片)/고대사 2009. 5. 19. 00:24 Posted by 아현(我峴)
화랑에 대한 생각들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화랑에 대한 인식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세력에 맞추어 화랑의 모습을 생산해 왔습니다. 고려시대만 보아도 화랑을 보는 눈은 문인마다 제각각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화랑을 열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체로 열심히 싸우다 장렬히 죽은 군인으로, 청렴한 관리로, 효도를 실천하는 이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유교화된 <삼국사기>와는 다르게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투영되어 있습니다. 국선 미시랑이 흥륜사 진자 스님의 애절한 기도로 태어나 신라와 인연을 강조하거나, 수행자 혜숙이 화랑의 새로운 국선이 짐승을 마구 죽이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먹으라고 하면서 살생유택을 가르칩니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 도교적인 취향이 강한 문인들은 네명의 국선이 명승지를 유람하며 자연을 즐기는 도사쯤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고려시대가 이정도인데 조선시대로 들어오면 더 극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화랑제도를 인재등용법 정도로 생각했고, 근대초기 민족주의자들은 한국적 무사도로 이해했습니다. 일본 어용학자들이 일본의 무사도를 강조했듯이, 민족주의자들도 한국에서 그러한 특징을 찾으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재 신채호는 이에 더하여 화랑사상을 한국 고대의 무속신앙과 연결시켜 우리 고유 사상의 진수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확대해석하여 윤관의 여진정벌이나 묘청의 난을 사대주의에 맞선 우리 고유 화랑 사상의 발로라고까지 평가했습니다. 한편 국학자 안확은 고대 조선의 무사도의 꽃 화랑이라고 하면서, 관인(寬仁)의 정신, 충신(忠信)의 정신의 기반을 화랑도라고 하여 서양의 기사도 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1930년대 좌파 지식인의 화랑에 대한 평가는 냉정했습니다. 김태준은 화랑을 노예반란의 진압준비를 위해서 무장하여 군사 연습을 일삼았던 노예주들의 자위단(自衛團)으로 보았는데, 이는 북한이 고구려를 정통을 보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1979년 나온 북한의 <조선전사>에는 세속오계를 반동적인 도덕규범으로 단정하고 화랑의 전공(戰功)을 범죄적인 동족상잔에서 얻었다고 깍아버렸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안확의 생각을 계승한 남한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공식 역사가인 이선근이 쓰고 결국 군대의 정훈 교과서가 된 <화랑도연구>에서 신채호를 능가하려는 듯 화랑도정신을 3·1운동의 정신으로까지 연관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화랑정신은 ‘애국, 멸공 전신’의 원조가 되어 육사의 소재지가 화랑대가 됩니다. 그리고 경주에는 신라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랑 교육원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최근 화랑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소설을 통해서 화랑들의 동성애와 이성애 그리고 현란만 무예훈련이 강조가 되었습니다. 화랑이 민족의 전사에서 얼짱과 몸짱 그리고 꽃미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화랑(花郞)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꽃미남이 되죠.

이처럼 화랑은 군자이자, 효자, 불교적 수행자, 국가가 등용하려는 인재, 전사, 무장한 노예주, 애국정신의 화신, 그리고 연애와 섹스에 뛰어난 얼짤까지. 화랑의 이미지는 이처럼 다양해졌습니다. 화랑의 이미지도 다양하긴했지만, 역사적 실체로서의 화랑도 대단히 다양했습니다. 일정한 국교가 없던 신라에서 화랑 조직에 속한 귀족의 자제들은 유교와 불교, 도교 그리고 토착적 무속까지 두루 학습, 실천하면서 독특한 세계관, 윤리관을 만든 것은 당연했습니다. 화랑은 독실한 불교신자이자, 유교적 경세에 뜻을 둔 유자였고, 검술 연습과 함께 불보와 산신에게 기도를 하고 과감한 연애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섞임이 곧 신라인의 삶,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혼란의 역사에 ‘국방색’을 덧칠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합니다.

출처 : 박노자, "화랑은 무사집단이었을까", <한겨레21> 제716호, 2008.7.1.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