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국왕의 행차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21 Posted by 아현(我峴)
조선시대 국왕의 행차

행행(幸行)은 지난 번 아조에서 종묘제례나 은영연 때 이루어졌었는데, 국왕의 행차를 의미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실제로 행행이 어떻게행해졌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행행은 국왕의 면모를 대내외에 드러내어 그 권위를 상징함과 동시에 신료부터 민인(民人)에 이르기까지 통치자의 실체를 파악하게 하는 정치행위의 하나였다. 이런 개념으로 본다면, 행행은 바로 왕실행사이자 국왕과 신료, 민인과의 관계를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국가적 정치행사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행행은 능행(陵幸)과 원행(園行) 등 도성을 벗어난 화려한 국왕의 행렬을 연상하지만, 종묘와 사직, 문묘, 사친궁묘의 행행은 이와는 달랐다.

조선초기부터 社稷은 종묘와 함께 조선왕조의 정통성과 왕조의 권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국가 제사가 거행되던 장소였음에도 국왕이 직접 사직에 행행하여 제사를 지낸 것은 세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로 볼 때 사직 행행은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행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며 종묘에 비하면 매우 미약하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국왕의 사직 행행이 가장 활발하게 거행된 것은 영조와 정조대였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더 이상 사직 행행은 국왕의 행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다음은 도성내 사직 행행의 절차를 단순화한 것이다.

* 택일(擇日-날짜 선택)
* 군령(軍令-병조에서 궁궐부터 행행지 사이 거리와 당일 환궁의 여부를 알림)
* 수가군(隨駕軍)과 유영군(留營軍)의 선정
* 유도군(留都軍)의 영솔자 선정
* 수가군병(隨駕軍兵)의 복색과 군율, 절차, 출환궁시의 부대 동원 등을 정함
* 행행(幸行) 전날 각 담당 부서로 전령(傳令), 도로정비
* 행행(幸行)

종묘는 왕실조상과 선대 국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보면 그 어떤 궁실이나 공간보다 성스러운 곳이었다. 이에 임진왜란 이후 제일 먼저 영건된 것이 종묘였으며 역대 국왕의 행행에서 다수를 점하는 것도 종묘였다는 점에서 그것을 잘 반증해주고 있다. 대체로 종묘 행행도 영조와 정조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아마도 국왕권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종묘 행행 시기가 대부분 1월에 몰려 있거나 종묘의 春享大祭와 秋享大祭가 거행되던 봄과 가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종묘의 기능과 상징성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묘 행행도 살펴볼 수 있는데, 사직이나 종묘와는 달리 인조 이후에는 재위년에 비해 10% 전후의 비율로 문묘 행행을 거행되었다. 문묘에서 진행된 행행의 경우 대체로 봄과 가을에 집중되는데 이는 2월과 8월에 석전제를 지내기 때문이며, 특히 조선후기 국왕들의 문묘 행행에서 특징적인 것은 문묘에서 작헌례와 함께 대부분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시행한 것이다.

위의 세가지 행행을 종합해 보면 국왕의 도성내 행행에서 종묘→사직→문묘의 순으로 그 비중이나 상징성을 자리매김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사친궁묘(私親宮廟)에 대한 행행은 자주 진행되었다. 사친궁묘란 국왕의 生母나 生父의 사당을 말한다. 영조의 경우 소상궁, 정조의 경모궁, 순조의 휘경원 행행이 대표적이다. 영조는 52년 동안 사직 19번, 종묘 113번, 문묘 13번 행행한 반면에 소상궁에 251번 행차했다. 정조도 24년 동안 사직에 20번, 종묘에 65번, 문묘에 9번 행행한 반면에 소상궁에 44번, 소령원에 2번, 경모궁에 무려 344번, 현륭원에 11번으로 사친궁묘에 총 401번 행행했다.

오히려 도성내에 위치한 사친궁묘에 대한 행행이 국가적인 의례장소로 인식되던 종묘와 사직, 문묘에 대해 비해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선후기 국왕의 도성내 행행도 도성외에서 거행하던 능행, 원행 등과 동일하게 국왕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 있는 사친에게 행행을 집중하는 정치적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국가적 의례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국왕도 또한 백성과 마찬가지로 사친에 대한 정(情)은 끝내 어쩔수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이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정치와 사정(私情)의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우리의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출처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都城內 幸行의 추세와 변화”, <조선시대사학보> 43, 200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