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노비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20 Posted by 아현(我峴)
자매노비는 양인(良人)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에 의해 판매됨으로써 노비가 된 자입니다. 자매노비의 존재는 노비제의 쇠퇴기로 아려져 있는 18세기 후반 이후에 양인이 노비화가 국법에 의해서 금지되었음에도 실제로 합법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자매노비는 1780년에 급증하여 1820년대에 이르러 격감하였는데, 1870년대에 이르면 다소 증가하다가 다시 감소하는 추세를 보입니다. 그럼 자세한 자매노비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세기 이후가 되면 사실상 노비제가 쇠퇴하고 임노동제의 성장이 동시에 진행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비제의 쇠퇴가 주로 노비의 신분상승이라는 신분제의 해체와 관련된 설명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노비제와 임노동제가 직접 관련되지 않고 노예제-농노제-자본주의라는 발전상에서 노비제의 연구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노비제의 해체를 소농의 성장으로 보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와같은 그동안의 노비제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조선후기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따른 농민층 분해로 인해 토지를 상실한 농민들이 다수 발생함으로써 임노동의 공급이 증대되었습니다. 2. 소농경영의 발달로 인해서 농업노동에서 노비를 이용한 경영방법이 쇠퇴하여 노비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였습니다. 3. 추쇄 정책의 완화 등 국가 정책변화에 의하여 노비소유주의 노비에 대한 관리비용이 증대하게 됨으로써 노비에 대한 수요가 감소하였습니다. 4. 세습법의 완화로 인해 노비의 공급이 감소되었다. 한마디로 노비의 수요와 공급이 줄어든 대신에 임노동의 공급과 수요가 증대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비제의 쇠퇴 시기에 등장한 자매노비의 존재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왕조의 국법은 양인의 매매를 일관되게 금지하였습니다. <대명률>에도 명시되어 있지만, 1690년에 자매하거나 매입한 자에 대해서 장 100대와 도(徒) 3년에 처한다는 전교가 내려진 이래 1744년 <속대전>에 이 전교가 수록이 되고 노비제가 폐지된 갑오개혁까지 유효한 법률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는 <신보수교집록>에 1664년 채무자의 자녀를 노비로 삼는 것을 금지한다고 한 이후 이 또한 <속대전>에 규정되었습니다.

자매노비의 문기(文記)의 존재가 18세기 후반 이후 줄곧 발견되데 이는 자매행위를 금지하는 국법이 사실상 실효가 없었음을 말해줍니다. 18세기 후반 등장한 자매노비는 도망노비나 누락노비처럼 불법적인 노비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존재로서 문기에 자매임을 명기하고 관부로부터 증명(立案)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자매문기의 내용중 하나입니다.

1747년 4월 상경(上京)하여 투탁(投託)을 원하는 안주(安州)의 양인(良人) 원규(元圭)와 처, 누이를 중화(中和)노비로 가칭(假稱)하여 조도정가(趙都正家)에 방매(放賣)하였다.(원규는 중화비(中和婢) 영말(永末)의 소생으로, 처는 중화비 계진(戒眞)의 소생으로 가칭) 원규의 누이는 중화비 영말의 소생으로 가칭, 그 남편은 중화비 옥진(玉眞)의 소생으로 가칭하여 소공동(小公洞) 한서방가(韓書房家)에 방매하였다.(조도정가에는 22냥 5전에 팔았음)

위 문기를 보면 안주에 사는 원규와 그의 처, 누이를 각각 서울에 와서 스스로의 몸을 팔아 노비가 되었는데, 이때 돈 22냥5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몸을 파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중화지역의 노비라 거짓으로 칭하고 또한 부모의 이름 또한 가칭하고 있습니다. 즉 18세기 중반에는 양인들이 합법적으로 자신을 판매하지 못하고 노비의 신분으로 문서를 위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조선왕조는 자매노비라고 하여 노비로 표현하는 것을 기피하고 있었지만, 전매되지 않고 세습되지 않으며 속량(贖良)을 허용한다는 조건에서 양인의 자매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양인의 자매를 처벌하도록 되어 있는 국법을 자매노비가 고공과 동일한 범주라고 합리화함으로써 이를 피해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매노비와 고공은 종신인가 기간의 정해져 있는가의 차이만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1794년 예조에서 전국의 의열인(義烈人)을 추천하면서 양구(楊口)의 한 사인(士人)이 기근으로 인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신을 팔았는데, 몇 달이 지나서 자신을 산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지만 사양하였다는 것을 미담으로서 보고하였습니다. 유교윤리에 의해서 부모를 모시기 위해서 자신을 판 것이 국가에 의해서 상찬되고 있는 것인데, 이 시기에 이르면 자매행위가 묵인의 정도를 넘어 완전히 합법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자매노비의 비율을 보면 흉년이 전체 사례에서 26.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부모 봉양 또한 부모의 장례를 위한다는 것이 23.9%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죽은 부모의 장례를 위해서 자매하고 있는 것은 유교적 의례가 빈궁한 자들의 경제에 심각한 부담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빈궁을 이유로 제시한 것이 10.9%였습니다. 한편 채무를 이유로 자매한 사례는 전체의 10.9%로 많다고는 할 수 없는데, 채무를 이유로 노비로 삼을 수 없도록 한 국법이 현실에서 그대로 지켜지기 어려웠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내용이 좀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18세기가 되면 노비제가 해체되어 노비인구가 줄어드는 데 반하여 자매노비는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매노비의 성격 자체에 대한 문제와 자매노비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부분이 본 강의의 내용이었습니다. 특히 자매노비에서 부모를 위한 부분이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는 것은 노비에게도 유교의례가 강하게 침투했다는 설명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으며, 농민들에게 흉년과 기근이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큼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김재호, "자매노비와 인간에 대한 재산권, 1750-1905", <경제사학> 38, 2001.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