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청이 입관(入關)으로 화이(華夷)에 대한 국제정세는 전통적인 화이관(華夷觀)에 변화를 가져왔고, 여러나라로 하여금 개성적 자기인식을 추구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자신이 이적(夷狄) 출신인 연유에서 청의 전통적 조공과 책봉체제에 대한 집착은 직접적으로 군사적 배후를 이룬 조선과의 관계를 예외로 한다면 그리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조공체제에의 편입에도 불구하고 타이왕조는 타이어로 상주문을 작성하여 청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베트남의 경우에도 대내적으로 황제를 칭하였습니다.

중국 한족을 중화로 주변을 이적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종족적 화이관은 청의 중원 지배에 있어서 오히려 장애물이었습니다. 옹정제는 한족 지식인을 사면(赦免)하면서 중국와 화이의 구분은 땅이 아닌 보편적 윤리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을 따름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화이관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17~18세기의 조선왕조야 말로 다른 나라에 비해 신판 화이관에 가장 철저한 나라였습니다. 화(華)는 더 이상 혈통상의 한족이 아닌 문명과 예의의 주체라면 이(夷)도 얼마든지 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전도의 치욕과 명청교체의 충격은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조선소중화론으로 몰고가고 있었습니다.

분명 이러한 대명의리와 북벌대의의 기치는 송시열에 의해서 완성이 됩니다. 1704년의 대보단의 설치와 1798년 정조가 명한 <존주휘편>도 모두 이러한 인식이 흔들리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반증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정치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조선제일주의라 할만한 자존의식은 18세기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식은 불가피하게 자기폐쇄적인 고립주의로 빠져들게 합니다. 청과의 조공책봉체제라는 엄연한 현실과의 모순도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소중화론의 관념성에 대해서 본격적인 비판이 이루어진 것은 남인 출신의 이익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서양과 중국사정에 밝아 조선의 중화됨을 부정하였습니다. 그의 소중화론 비판은 도덕적 내수(內修)보다는 실용적인 제도개혁을 지향했습니다. 성호의 명분론적 역사관과 거의 같은 취지로 그의 제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였습니다. 그는 위만왕조를 찬탈왕조로 발해를 말갈왕조로 보아 동사강목에서 제외하였습니다. 일본도 도이(島夷)라 부르며 전통적인 대등교린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실학자들에게서 민족의식을 찾아내기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남인계열과는 달리 지배정파인 노론에서 형성된 북학파의 소중화론 비판은 훨씬더 영향력이컸습니다. 연행(燕行)의 기회가 컸던 그들에게 청과 대비된 조선의 낙후상은 그들을 과감하게 북학을 주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홍대용은 화(華)와 이(夷)는 하나라고 주장하였고, 박지원과 박제가는 청조와 그 지배하의 중화의 문물은 다른 것이라는 어색한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주장도 정통 주자학파에 의해 정립된 폐쇄적이며 보편적인 중화주의적 지향을 재해석함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보여집니다.

1820년대가 되면 다시 중화가 된 청으로서의 종속을 당연시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운명을 청조의 안위(安危)와 동일시하는 생각마저 대담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서구의 열강과 일본의 침입을 맞아 오로지 청조로의 의존을 기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죠.

피상적으로 소중화론과 실학과의 관계를 진술해 보았습니다. 실학이 반드시 근대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중화론은 고종대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고 하는 것이 옳은 시각으로 보입니다. 즉 중화론->소중화론->중화론으로의 전개가 조선후기 사상사의 큰 흐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출처 : 이영훈, "18~19세기 소농사회와 실학", <한국실학연구>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