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두 마을의 역사

사편(史片)/근현대사 2009. 5. 19. 00:10 Posted by 아현(我峴)
한국전쟁과 두 마을의 역사

읽으려고 예전에 복사해 놓은 논문있었는데, 지금에서야 시간이 나서 읽고 강의글로 올려 봅니다. 이번 이야기는 한국전쟁과 두 마을의 역사입니다. 한국전쟁이 마을 역사에 가져온 변화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연구대상은 충남 부여군 X면의 진주강씨 A마을과 풍양조씨 B마을입니다.

* A마을은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로 2003년 기준으로 89세대가 살고 있습니다. 주민의 90%가 진주강씨로 민촌(民村)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민촌이라고 하면 유력한 양반이 없는 평민적인 성격을 가진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대개 영세 소작농이으로 지냈으며 항상 반촌(班村-양반마을)인 인근의 B마을에 눌려살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일제시대가 되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A마을에서 관리나 민족운동가가 대거 배출되기 때문이었죠. 이들은 또한 사회운동에서는 민족해방운동가들과 연결이 많아집니다. 이 때문에 A마을 사람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직원을 맡는 인물도 나오게 됩니다. 근대 이후에 A마을에서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오랫동안 신분제로 인하여 B마을에 억눌려 왔던 A마을 사람으로서는 어느정도 기를 펴고 살았다고 보여집니다.

* B마을은 A마을과 남쪽으로 1km정도 떨어져 있으며 73세대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중 풍양조씨는 45세대입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내내 부여군 전체에서 상당한 큰 힘을 발휘하였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부여군의 대표적인 양반가문이었죠. 20세기 전반 이 말을의 유력자들은 소지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농지개혁때는 소작인에게 헐값으로 땅을 팔아넘겼다고 합니다.

* <사마방목>에 의하면 A마을의 진주강씨는 한명의 생진시 합격자도 없었지만, B마을의 풍양조씨는 15명이나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A마을은 B마을에 항상 눌려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제시기 열심히 일해서 농지를 사들이기도 했지만, 농사일 때문에 B마을 앞으로 지날때면 B마을의 양반들이 그들을 불러 먹을 것을 바치고 갈 것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A마을 사람들은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894년 공식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1920~30년대에도 특권적 신분의식은 여전히 사람들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 양반들이 ‘의식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1934년 천안에서는 술집 주인이 양반에게 밀린 술값을 독촉하다가 양반에게 대들었다 하여 마을의 양반 10여명에게 몰매를 당하고 마을에서 축출당하기도 하고, 청주에서는 20세된 된 양반 출신의 청년이 70세된 평민 출신 노파를 언행이 불미스럽다 하여 폭행했다는 기사가 보입니다. 1930년대가 되면 B마을에서도 A마을 사람들을 무시하지는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해방직후가 되면 A마을 출신의 강진구가 건준위원장과 인민위원회에 활동하게 됩니다. 또한 A마을 사람들은 인민위원회나 남로당과 관련을 맺게 되는데 부여 남로당의 거물들이 A마을에 은신처를 정하고 숨어지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한편 B마을의 경우네는 대한청년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이 경찰의 끄나풀이 되면서 A마을 사람들의 동태를 경찰에 알려준다고 A마을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 1950년 5.30선거에 출마하고자 했던 A마을의 강진구가 경찰에 붙잡혀 가 출마하지 못한 것도 B마을 사람들의 짓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한국전쟁이 터지자 두 마을의 평소 갈등이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인민군이 남하하자 부여군의 경찰은 철수하는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낙화암 고란사로 끌고가 처형했다고 합니다. 이때 A마을에서 끌려가 처형된 사람도 4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보도연맹사건은 결국 인민군의 남하와 함께 보복처형이 이어지게 됩니다. A마을 주민들은 B마을의 이장을 끌고가서 못매를 가하여 그들 살해하고 맙니다. 이렇게 곳곳에서 처형사건이 이어지자 북한 점령당국은 8월 11일자로 남한의 각 점령지역에 “남한부 해방지역에 있어서의 당면 검찰사업에 대하야”라는 공문을 보내는데, 이는 모든 반동분자는 재판에 의해 진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공문대로 일이 진행될리 만무하겠죠. 아마 위의 사건도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것이라 보입니다. 또한 B마을에 살던 조동을(가명)이 인민재판에 부쳐져 처형되는데 뚜렷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그는 B마을 조씨 중에서 가장 똑똑한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민군의 부여 점령 기간은 석달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피하지 못했다고 합니다.그 사이 경찰이 마을에 들어왔고 경찰은 이 마을을 빨갱이마을로 지목하여 B마을 사람과 함께 A마을을 포위하고 A마을의 성년남녀를 모두 체포하여 X면 경찰지서 밑 굴 속에 감금했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면당위원장을 맡았던 강석병과 또 한명이 경찰에게 붙들려 피살되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재판에 회부되어 4~5년을 복역 뒤에 귀가했다는데, 집에 도착하니 가재도구가 모두 사라졌다고 합니다. B마을에서 모두 가져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A마을의 한 사람은 B마을 사람의 조심하라는 협박성 이야기에 때문에 심적 압박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A마을의 장로격이었던 강석구는 B마을 사람들에 의해 금강변으로 끌려가 머리만 내놓고 백사장에 파묻히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이는 옛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A마을의 상징인 나무를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한숨을 돌리는 사건된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1.4후퇴입니다. 이때부터 A마을 사람에 대한 주위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지서의 굴에 갇혀있던 이들도 풀러나왔습니다. 더 이상 B마을 사람도 A마을 사람들을 괴롭히지 못했다고 합니다.

* 전쟁은 두 마을 사이에 강을 만들어 놓았고 A마을은 완전한 패자, B마을은 완전한 승자가 되었습니다. B마을은 여전히 A마을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B마을 사람들도 전쟁 와중에 몇차례 뒤집히는 것을 보고 A마을 사람들을 계속해서 함부로 대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1950년대가 되면 A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경쟁의식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을 아이들이 같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는 가을마다 운동회를 하는데, 이때 승리하기 위해 심지어 외부에서 태권도 사범을 초빙하여 마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결국 A마을 사람들의 경쟁의식은 B마을 사람들의 대응을 불러일으켜 두 마을 사람들의 대결의식으로 발전되어 갔습니다. 농번기에 두레패들이 부딪히면 씨름으로 승부를 내고, 정원대보름에는 마을 경계 논두렁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쥐불싸움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전쟁이나 다름없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두 마을 모두 힘겨운 일이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금강의 홍수였습니다. 이는 두 마을의 협력이 필요한 사항이었습니다. 무언가 타개해야 할 방안이 필요했습니다. A마을 강동구씨는 전쟁때 사건으로 4년간 감옥에서 고생한 분으로 1963년 B마을의 친구 조남찬에게 놀러가자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하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A마을에서 5명, B마을에서 8명이 군산에 놀라가서 이를 핑계로 모임 제의를 말하고 결국 B마을에서 찬성하여 ‘강호동지회(江湖同志會)’가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두 마을 사이에 많은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제방설계를 하고나서 강변에 엄청난 농지가 만들어졌습니다.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두 마을 합하여 1500여동으로 모두 수박농사를 지어 한 가구당 5천만~1억 정도의 수입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도시로 떠난 이들도 다시 들어온다고 합니다. 전쟁이후에 두 마을은 아직도 강력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필요에 따라서는 협조하고 의지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마을의 관계는 아직도 서먹서먹하다고 합니다.

참고문헌 : 박찬승, “종족마을 간의 신분갈등과 한국전쟁-부여군 두 마을의 사례”, <사회와 역사> 69, 2006.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