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새로읽기03반(보고서2)

건양대강의/2013.2학기 2013. 11. 19. 17:21 Posted by 아현(我峴)

* 아래 두 송시열의 졸기를 보고 송시열이 어떠한 인물인지 A4 1장으로 정리하시오.

* 제출시기 - 12월 9일(월)까지 이메일로(erebus13@naver.com)

* 제출 요령 : 메일 제목은 "건양대 한국사새로읽기 03반 보고서2 00학과 (성명)"

                   파일 제목은 "03반-보고서2-00학과-(성명)"


* 송시열의 졸기(卒記) 1 - <숙종실록> 21권, 15년(1689) 6월 3일 기사.

병조판서 민암이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의 지극히 흉하고 악함은 국문을 기다리지 아니하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종(祖宗)께서 나라를 세움이 인후(仁厚)하여 일찍이 대신을 국문하지 아니하였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대신에게 물으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송시열의 죄범(罪犯)은 흉역(凶逆)하나, 나이가 80이 넘었으므로 국문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상께서 참작해 처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목내선과 김덕원의 말도 같았다. 한성우윤(右尹-현재의 서울시 부시장) 목창명(睦昌命)은 말하기를, “신이 대각(臺閣-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을 때에 국문하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의논하는 이가 모두 잘못이라고 하니, 바로 처분을 내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참작하여 사사(賜死-사약을 내림)하되, 금부 도사(禁府都事-조선 시대에, 의금부에 속하여 임금의 특명에 따라 중한 죄인을 신문(訊間)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오품 벼슬)가 갈 때에 만나는 곳에서 즉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제주(濟州)에서 나치(拿致-체포)되어 돌아오는데 바다를 건너와서 중궁(中宮-왕비)을 이미 폐한 것과 오두인(吳斗寅)·박태보(朴泰輔)가 간언(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을 하다가 죽은 것을 듣고는, 드디어 먹지 아니하고 정읍현(井邑縣-현재 전라북도 정읍시)에 이르러 사사(賜死)의 명을 받자, 이에 유소(遺疏-유언을 담은 상소) 두 본(本-개)을 초(草-베끼다)하여 그 손자 송주석(宋疇錫)에게 주어 다른 날을 기다려 올리게 하고, 또 훈계하는 말을 써서 여러 자손에게 남겼다.

아들 송기태(宋基泰)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형벌을 쓸 때 현일(弦日-음력 7, 8일의 상현(上弦)과 22, 23일의 하현(下弦)을 가리킴)을 꺼리니, 마땅히 이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니, 송시열이 들어 주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내가 병이 심하여 잠시를 기다릴 수 없으니, 명을 받는 것을 늦출 수 없다.” 하고는 드디어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니, 이때 나이가 83세이다.

송시열은 은진(恩津)사람인데 그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다. 일찍이 꿈에 공자(孔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집에 이르는 것을 보고 송시열을 낳았기 때문에 소자(小字-어릴 때의 이름)를 성뢰(聖賚)라고 하였다. 천자(天資-타고난 기품)가 엄의강대(嚴毅剛大-엄숙하고 굳세며 강하다)하여 어려서부터 이미 성학(聖學)에 뜻을 두었고, 자라서는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웠다. 뜻이 독실하고 힘써 실천하여 더욱 채우고 밝힘을 가하니, 마침내 동방 이학(東方理學)의 적전(嫡傳-정통의 혈통에서 이어받음)이 되었다. 대저 그 학문은 일체 주자(朱子)를 주(主)로 하였고, 동유(東儒-조선의 유학자)로는 이이(李珥)를 제일로 삼았다. 그 언행(言行)·어묵(語默)·출처(出處)·진퇴(進退)는 움직이면 주문(朱門-주자의 학문)의 법을 따랐으며, 그 성취(成就)한 바에 대하여 논하면 그 높고 정밀하며 멀고 큼은 근세(近世)의 뭇선비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병자년(1636년, 인조14년) 이후로 관구(冠屨-의관 제도, 의례)가 무너진 것을 분하게 여겨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다가, 효종이 처음 정무(政務-정치)를 볼 때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 여러 어진이와 더불어 조정에 나아갔다가 곧 돌아왔다. 효종이 큰 뜻을 가지고 송시열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할 만한 것을 알고는, 김익희(金益熙-김장생의 손자)를 보내어 성의(聖意-왕의 생각)를 비밀리에 유시(諭示-관청에서 백성에게 알리는 일)하니, 드디어 계합(契合-뜻이 서로 맞음)이 융숭하고 중하여 선생이라고 일컬었으며, 특별히 독대(獨對-혼자 왕과 이야기함)를 내리고 또 밤에 현종(顯宗)에게 명하여 친히 어찰(御札-왕의 편지)을 전하게 하였다. 송시열이 감격하고 분발하여 스스로 춘추대의(春秋大義-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큰 의리)를 세웠는데, 효종의 승하(昇遐-왕의 사망)하자 애통하고 사모하여 살고자 아니하는 것처럼 하였고, 효종의 재궁(梓宮-관)에 부판(付板-판자를 붙인 것)을 썼으므로 유명(遺命-왕의 유언)으로 자기의 상(喪)에도 부판을 쓰게 하고, 휘일(諱日-조상이 죽은 날)마다 어찰(御札)을 가지고 종일 통곡하였다.

이이(李珥)의 시대로부터 조정의 선비들 이미 사정(邪正-동인과 서인)의 당(黨)으로 나뉘어졌는데, 김장생(金長生)은 매양 음양(陰陽)·선악[淑慝]의 분변에 조금도 가차가 없었고, 송시열에 이르러서는 더욱 세도(世道-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를 스스로 맡아서 윤리(倫理)를 거스리고 인심을 허물어뜨리며 위험하고 간사한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반드시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힘써 물리쳐서 원수와 원망이 세상에 넘치는 데 이르렀으나, 오히려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며, 적(敵-원수) 윤휴의 무리에게 꺼리고 미워함을 가장 많이 입었다. 갑인년1674) ·을묘년(1675년)의 화(禍)에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면하고, 경신년(1680년) 경화(更化-개혁)에 거두어 서용(등용)하고 돈독히 부르는 명이 있자, 정자(程子)의 서감(西監)의 예(例-정자는 송(宋)의 학자 정이(程頤). 정이가 휘종(徽宗) 원부(元符) 3년(1100)에 귀양지인 부주(涪州)로부터 돌아와서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에 제수되자, 명을 받고는 곧 나아가 알현(謁見)하였음 에 의하여 잠시 들어갔다. 곧 국휼(國恤-國喪)을 만나니, 성모(聖母-대비) 께서 언찰(諺札-한글편지)로 간절하게 만류함으로써 몇 달 힘쓰다가 돌아갔다. 계해년(1683년)에 또 부르기를 더욱 돈독히 하니, 송시열이 효묘 세실(孝廟世室-종묘에 있는 효종의 신위를 모신 공간)의 논의가 한 번 조정에 발론되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함으로써 항상 한(恨)스러워하다가 이에 미쳐 명령에 응하여 맨 먼저 이를 건의하였다. 이때 박세채(朴世采)도 조정에 나아가니 조야(朝野-조정과 지방)에서 좋은 정치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바랐는데, 이때 의논이 도리어 불화함을 품어서 참합(參合-섞이고 합함) 하고자 하기에 이르러, 을묘년의 흉당(凶黨-남인을 가리킴)과 더불어 같이 일하였으나, 송시열은 이미 일체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으로 몹시 옳지 못하게 여겼으며, 수상(首相-영의정) 김수항(金壽恒)도 대대로 그 조부의 착함을 드러내고 악함을 징계하는[彰癉] 논의를 지켰다. 이 때문에 송시열과 더불어 뜻이 합하였으므로 당시의 무리가 김수항과 아울러 공격하여 훈척(勳戚-친척)에게 편당(당을 가름)을 한다고 지목하였는데, 송시열이 화(禍)을 입는 데 미쳐서는 이것도 죄를 얽는 한 단서가 되었다.

윤증(尹拯) 부자(父子)는 본래 윤휴(尹鑴)를 편들고 송시열과 어긋났는데, 윤증이 당시의 의논이 이와 같음을 보자, 갑자기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헐뜯고 배척하니, 당시의 무리가 이에 드디어 윤증을 도와서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윤휴·윤증의 무리가 두 감정을 번갈아 부채질하여 해기(駭氣-화가 일어날 기미) 가 더욱 벌어져서 드디어 극진한 화에 이르렀다. 송시열이 윤휴와 윤증을 배척할 때에 비록 송시열을 존중하는 자라고 하더라도 혹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으나, 그 끝에 가서는 마침내 모두 송시열의 말과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모두 그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임명(臨命-임종, 죽음)에 문인 권상하(權尙夏-송시열의 수제자)의 손을 잡고 부탁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묘(孝廟)께서 하고자 하시던 뜻을 주로 삼을 것이다. 주자의 이른바, ‘함원인통 박부득이(含冤忍痛迫不得已-원통함을 품고 어찌할 수 없어서 한다는 말)’ 여덟 글자를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이 전수하여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지가 만물을 생(生)하는 소이와 성인(聖人)이 만사에 응하는 소이는 ‘직(直)’ 일 뿐이다. 공맹(孔孟-공자와 맹자) 이래로 서로 전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곧을 ‘직(直)’자인데 주 부자(朱夫子-주자)가 문인에게 부탁한 것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한다.”하였다.

탐라(耽羅-제주도)에 갈 적에 일찍이 글을 지어 김장생(金長生)의 묘(墓)에 제사하여, 당인(黨人)이 화(禍)를 꾸민 전말(顚末-모든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였고, 또 그 부모의 묘에 제사한 글에 그 평생의 출처(出處)를 두루 서술하였는데, 사실이 매우 상세하며 모두 유집(遺集-남은 글을 모은 문집)에 있다. 권상하가 그 화상(畫像-초상화)에 찬(贊)하기를, “높고 높은 산악의 기상이요 넓고 넓은 하한(河漢-우주)의 마음이라. 미쁘도다. 뭇 선비의 학문을 모은 대성(大成)이오, 울연(蔚然-나무가 우거진 모양)하게도 백세(百世)의 사종(師宗-스승을 받들어 모시는 사람)이 되었도다. 한 몸으로 성인(聖人)의 길이 장차 막히려는 것을 열었고, 한 손으로 하늘의 기둥이 이미 쓰러지는 것을 받들었도다. 깊은 궁중에서 비밀히 협찬한 것은, 내가 그 무슨 계책임을 알지 못하겠고,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탄식하는 것은, 내가 그 무슨 포부임을 알지 못하겠도다. 아아, 도(道)가 커서 용납할 수 없으니, 내가 장차 고정(考亭-주자) 을 버리고 누구를 따르겠는가?” 하였고,

김창협(金昌協)은 찬(贊-짓다)하기를, “호걸 영웅의 자질(姿質)로써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공(功)이 있었고, 호연(浩然-물이 거침없이 흐르는 모양)의 기운을 가난한 집 가운데 모아서 우주(宇宙)에 채울 만하였으며, 지극히 중한 임무를 한 작은 몸으로 맡아서 화숭(華嵩-산 이름)의 높음과 겨룰 만하였도다. 나아가서 묘당(廟堂)에 올라 제왕의 스승이 되었으나 그 궁(窮)함을 보지 못하겠다. 굳굳한 지주(砥柱-하남성(河南省) 섬주(陝州)에서 동쪽으로 사십 리되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주상(柱狀)의 돌.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격류(激流) 속에서 우뚝 솟아 꼼짝도 하지 않으므로, 난세(亂世)에 처하여 의연(毅然)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의 비유로 쓰임)는 홍수 속에 우뚝하고, 늠름(凛凛)한 푸른 솔은 한 겨울에 빼어났다. 만일 억만년 뒤에 이 칠분(七分-화상)의 모습을 보더라도 3백 년 간기(間氣-천지의 기운)의 모인 바를 오히려 알 것이다.” 하였다. 뒤에 억울함을 씻고 제문(祭文-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내렸다.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이다.

* 송시열의 졸기(卒記) 2 - <숙종실록보궐정오> 21권, 15년(1689) 6월 3일 기사.

전(前) 좌의정으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辭讓)하고 물러남)한 봉조하(奉朝賀-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종2품의 관원이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송시열(宋時烈)을 죽였다. 송시열이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한 뒤에 진계(陳戒-경계함을 말함)한 상소의 말이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에 거듭 저촉되어 모든 감정이 드디어 폭발하고 붕당(朋黨)의 참소가 이를 종용(慫慂)하여, 해도(海島-섬)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된 뒤에 이어서 합사(合辭-여러 관청이 합해서 하는 상소)의 청함이 있어, 반드시 죽인 뒤에 말고자 하였다. 금오랑(金吾郞-의금부 관원)에게 안법(按法-법을 살핌)하기를 명하여 이미 나치(拿致)해 오게 하였는데, 문득 또 만나는 곳에서 사사(賜死)하기를 명하여 정읍(井邑) 길 가운데서 후명(後命)을 받았다. 송시열은 삼조(三朝-효종·현종·숙종)의 원로(元老)로써 죄가 아닌 데도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해 하였다. 송시열은 영의 강과(英毅剛果)하고 기력(氣力)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어서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우고,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 제현(諸賢)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점차 갈고 닦아, 서로 도와서 알고 보는 것이 날마다 넓어졌다. 힘쓰고 가다듬어서 지조와 행실이 심히 확실하여 구검(拘檢-자신을 단속하는 것)에 힘쓰고 담부(擔負-맡은 임무)에 용감하여 주자(朱子)를 본받고 이이(李珥)를 존경하는 것으로 자임(自任-어떤 일에 대하여 자기가 적임이라고 자부함)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일에 임하여 용감히 추진하여 족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 복종하게 하는 바가 있었고, 자신의 처사하는 사이에는 너무 지나쳐서 인정에 가깝지 아니함이 있었으나, 논하는 자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복수(復讐-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대의(大義)로써 효묘(孝廟-효종)의 지우(知遇)를 만났고, 일세(一世)의 유명한 재상과 어진 선비가 그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기해년(1659년)에 상복(喪服)을 논하였을 적에 정의(正義)를 지켰고, 갑인년(1674년) 에 뭇 소인(小人)의 독한 모함으로 영해(寧海-현재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귀양갔는데, 또 고묘(告廟-나라 ·왕실 ·집안에 일이나 변고가 있을 때 그 일을 사당 또는 종묘(宗廟)에 고하는 일)하기를 청하여 한 걸음 사이에 도거(刀鉅)가 있었으나, 사류(士流-사대부)가 더욱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고 존중하여 명론(名論)이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높아서 유림(儒林-유학자)의 종사(宗師)가 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의례(議禮-기해예송) 이후로는 자못 애증(愛憎)으로써 시비(是非)를 삼고, 또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섭하여 대관(大官)과 요로(要路)를 내치고 올림과 주고 빼앗는 것이 송시열에게서 말미암음이 많았으며, 또한 다시 뜻에 따라 취하고 버렸다. 한 마디 말이 회덕(懷德-현재 대전광역시 대덕구, 송시열이 살던 지역)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 경신년에 조정에 나감에 이르러, 출처(出處)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았으니, 존호(尊號-왕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올리던 칭호)를 추상(追上-더 높여 올리는 일)하는 논의는 식자(識者)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김익훈(金益勳)을 신구(伸救-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사람을 구원함)한 말은 청의(請議-다수의 의견에 따라 합의하여 결정하기를 요구함)에 배치되므로 사류(士類)가 점점 더 실망하였다. 그 붕우(朋友)와 사생(師生) 사이에 처우하는 바가 전후에 결렬되고 위배되어 도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만년(晩年)에 말과 의논이 더욱 창광(倡狂-미친척하다)하여 상도(常度)를 잃음이 많아 전혀 도덕[道]이 있는 사람의 구기(口氣-말씨)가 아니었다. 드디어 선비의 추세(趨勢)가 분열되고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되자 송시열은 이미 명덕(名德)을 보전하지 못하고 나라와 더불어 패망하게 되었으니, 군자(君子)는 이를 시운(時運)에 돌린다.

대저 송시열은 크게 의심되지 않은 데 있었으나,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었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이 허술하여, 본래 함양(涵養)함이 없고 강(剛)함과 엄함이 지나치며, 가엾이 여기는 어짊이 적었다. 명목(名目)에 끌렸으나, 체험의 공(功)이 없었으며, 스스로 사문(斯文-유학)을 위호(衛護-지켜 보호함)하면서 당습(黨習-붕당의 폐습)의 괴격(乖激-어그러지고 격함)함으로 귀착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대의(大義)를 발명(發明-밝힘)하여 힘쓰면서도 도리어 패도(覇道)에 치우치고 〈인의(仁義)〉를 가차(假借-임시로 빌림)하는 병이 있었다. 처음에는 능히 통렬하게 갈고 닦으면서 말과 행실을 굳게 잡아서 우뚝하게 한 때 사람들이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군자(君子)는 본디 그 학술(學術)의 순수(純粹)하지 못함을 의심하는데, 그 혈기가 이미 쇠하게 되자, 스스로 다스림이 점점 허술하고 세상의 화(禍)를 겪어서 분함과 미워함이 이미 치우쳤다. 인도하여 아첨함에 익숙해지고 주장이 크게 지나치고 바로잡는 힘이 이미 약하여, 집요(執拗)한 성질을 돌이키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농간을 부리고 친당(親黨)이 그르치는 바가 되어 거조(擧措-행동거지)가 낭당(郞當-맞지 않음)하고 사기(辭氣)가 분치(忿懥-몹시 성냄)하여 젊은 시절에 비하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므로, 군자(君子)가 더욱 그 이름을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朴世采)가 일찍이 송시열을 논하기를, ‘대의(大義)로써 나와서 사화(士禍)에 죽었으니, 심히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혹자는 그 말을 취하여 ‘송시열이 죽자 비록 평일에 의논이 다른 자라도 가엾이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화(禍)를 입음이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윤증(尹拯)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초사(初史)를 편찬한 자가 반드시 적휴(賊鑴-윤휴를 가리킴)와 더불어 두사람의 감정(憾情)을 아울러 일컬어서 윤증을 화기(禍機)에 경중(輕重)이 있는 것과 같이 여김이 있었으니, 대저 경신년(1680년) 이전에 누가 다시 윤휴(尹鑴)를 도와서 송시열을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그것도 크게 말이 되지 아니하며, 단지 아이의 소견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은 말을 가지고 마음에 쾌하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암암리에 속이고 욕하며 거짓으로 과장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공정한 눈으로 보면 자못 한 번 웃을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또한 마음이 아프다.

 

 

송시열의 졸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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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