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과 광해군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08 Posted by 아현(我峴)
대동법과 광해군

선배의 좋은 글이 있어 간략하게 요약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전개해 볼 요량입니다. 본 내용은 KBS의 한국사 전 “명분인가 실리인가 고독한 왕의 투쟁 광해군”편에서도 나왔던 내용입니다.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는가. 어떻게 연구하는가에 따라서 같은 사실이라도 다르게 보이게 되고, 어떻게 다르게 비추어지는지 조금이나마 느꼈으면 합니다.

효종실록 권3 1년 1월 21일 을해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습니다.

송시열이 말하기를
“김집은 우의정(김육)이 상소에서 했던 말 때문에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의정의 상소 안에는 특별히 공격하거나 배척하는 말이 없었는데, 김집은 어째서 그렇게 결연히 떠났오?”
하였다. 송시열이 말하기를
“아마 대동법에 대한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던 까닭에 우의정이 편치 않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의(公義)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이렇게까지 격해지게 되었습니다. 분면 오고가는 떠도는 말이 있어서 김집의 마음을 놀라게 하였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눈치 채셨을 테지만, 바로 “공의”입니다. 대동법에 대한 논의는 모두 공의에서 나온 것인데, 대동법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공의로 바라보아야 할 대동법을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바라 보았다는 것이죠. 이러한 개별적인 대화 속에서도 바로 대동법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으로 광해군대 대동법을 바라보려 합니다.

조선 시대 세금은 밭에서 거두는 조(租), 특산물을 거주는 공물(貢物),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으로 나눌 수 있으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공물입니다. 공물을 거두는 것은 대개 그 지역에서 나는 산물로 하는데, 문제는 시간이 지나게 되면서 그 지역에서 산물이 안나오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을 대신 바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그러한 관행이 굳어지는데 그것을 일러서 방납(防納)이라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온 방법은 두가지로 하나는 공안(貢案-공물 목록)을 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동법의 전단계인 사대동(私大同)이 있습니다. 사대동은 수령의 권한(私)으로 토지에 균등하게 공물을 분정하는 것으로 지역단위로 시행되던 대동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동법은 공물을 토지를 단위로 부과하여 전세처럼 거두어 졌고, 대부분 쌀이나 포로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대동법의 추진 과정을 마치 계급론적인 갈등과 대립으로 환원시켰다는 것입니다. 마치 양반층과 농민층의 계급적 대립의 산물인 것처럼 대동법의 전개과정을 확대해석했다는 부분이 문제로 남게 된 것입니다. 조선후기의 지주-소작의 문제처럼 대동법의 해석도 그렇게 물고 가니 결국 광해군대의 대동법 해석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죠.

본래 공물문제는 연산군대의 산물입니다. 인재(人災)라고 할 수 있죠. 연산군을 좋게 보는 분들이 많은데, 연산군은 공물제도를 제대로 무너뜨립니다. 본래 재정조달은 지방->호조->의정부->국왕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연산군은 이것을 사옹원이나 내수사가 직계하도록 만듭니다. 조정의 논의 없이 직접 재정을 챙기겠다는 것이죠. 또한 연산군 7년에는 공안을 개정하게 되는데, 기본에 있던 공물 목록에서 그동안 추가 되었던 공물등을 마치 원래 있던 공물인 것처럼 공물의 양을 늘려버립니다. 수입과 지출의 내용을 완전히 무시한채 예산만 늘려 놓은 꼴이 되었죠. 연산군이 쫓게나고 중종이 들어서도 문제는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연산군대의 구폐(舊弊)들을 고쳐 나아가야 하는데, 중종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에 중종실록 25년 1월~2월 사이에 있는 사관(史官)의 말을 보면, 대궐에서 사용한 물품 수량까지 적어가면서 대놓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지부진한 공물 개정은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대혼란을 겪고 나서야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율곡의 제안을 유성룡이 이어서 적용하려고 하고, 광해군대 이원익이 다시한번 제도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대동법의 전개과정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한국사 전”에서는 마치 광해군이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처럼 설명했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반대입니다. 앞서 말한 계급적인 입장에 대한 환원론적인 해석의 결과인데, 양반들이 반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광해군도 마치 지주계급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상정하고는 광해군도 반대했다는 식으로 설명해버린 것입니다. 광해군도 과연 지주계급인가요?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왜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대동법은 공물제도입니다. 공물은 특산물을 왕실에 진상하는 것이죠. 즉 왕실에 바치던 특산물을 쌀이나 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과연 왕실에서 대동법을 좋아 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광해군을 시종일관 대동법을 반대했습니다. 광해군일기 권13, 1년 2월 5일 정사조를 보면

일전에 인견했을 때, 승지 유공량이 대략 선혜청 작미의 일은 불편한 점이 많아 영구히 시핼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당초 나의 생각에도 대동법은 사실 시행하기 어려울 것으로 여겼으나, 본청이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하고자 하기에 우선 그 말을 따라 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공량의 말을 들으니 심히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자가 모두 ‘특산물이 나는 곳에 공물을 바치게’ 하였던 데에는 그 뜻이 있다. 그런데 이번 방납으로 교활한 수단을 부리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이 작미라는 방법이 있었으니, 이는 그 근원을 맑게 하지 않고 하류만을 맑게 하고자 한데 가깝지 않은가. 나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광해군은 처음부터 대동법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유공량을 말을 듣고는 재차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원익과 이덕형 같은 소수의 인물들의 적극적인 소개로 대동법은 경기도에 한해서 시행을 하게 되고, 다만 이를 확대하지는 않는다는 선에서 광해군대의 대동법 시행이 마무리 됩니다. 장세철이 대동법을 팔도에 시행하자고 건의하지 광해군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광해군일기 권35 2년 11월 18일 을미조입니다.

선혜청은 오래 시행할 만한 일인가. 또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전결을 기준으로 쌀을 거두는 것은 오래 계속 시행하게 할 수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확대보다는 혁파하고자 하는 광해군의 의중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대동법의 확대는 인조대를 기다려야 했죠. 광해군의 정책을 이해하고자 할 때, 그의 실리주의 외교를 확대 포장하여 광해군의 국내정책 조차도 모두 실리주의나 실용주의라고 과장하는 것은 전형적인 아마추어리즘적인 역사라고 잘라 말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덕일 같은 분이 그러한 축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학계에 있는 분들도 그러한 수를 많은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역사학자라고 전문적인 학자라고 할 수는 없겠죠.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것들을 역사 에세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사 전”에서 나오는 해설들을 대개가 그런 부류들이죠. 그러나 문제는 그런 단순한 해석들이 방송에서 전해지고 이를 보는 시청자들이 그러한 것들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고정적으로 생각한다는데 문제가 있겠죠. 학교 때 암기 위주의 역사는 역시 방송에서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출처 : 오항녕, “이백년의 개혁, 대동법 1”, <역사교육>, 2008년 봄호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