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다시보기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06 Posted by 아현(我峴)
세종시대 다시보기

세종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내내를 보아도, 한국사 전체를 보아도 특별한 시대로 주목을 받아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의 모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폐 1만원의 주인공이 되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면에는 바로 세종시대가 조선적인 자주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가 한목을 하였을 것입니다. 역사학계나 과학사학계에서는 세종시대를 “과학사상 그 유례가 드문 황금시대를 이루었다”고 평가하거나, “15세기 전반기 세계 과학기술사에서 세종 때와 같은 유형의 발전은 어느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서방세계는 물론 아랍세계와 중국의 과학기술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라는 평가까지 나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과연 그랬을까 한번 되집어 볼 필요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당연하기에 거기에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로 빠질 우려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겠죠.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볼 문제는 바로, 유교적 보편성과 조선적 자주성이 가지는 함의를 되새겨보는 것입니다. 조금 어려운 문제일 수 있는데, 잠시 자주성을 잊고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세종이 바랬던 군주상과 조선이라는 국가를 어떻게 만들려고 했는지 세종의 마음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몇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 쉬울 것입니다. 첫 번째는 풍토부동(風土不同)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알다시피 중국의 풍토와 같지 않다는 의미로 조선의 자주성을 드러낼 때 자주 인용하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세종시대 업적으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훈민정음>이 있습니다. <농사직설>은 대개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업기술을 채록해서 낸 농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중국농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구책으로까지 해석하는 일면도 존재합니다. 농사직설에 나오는 농업기술은 대개 경상도의 농법으로 이미 경상도에서는 선진적인 수도작 기술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수도작기술은 중국강남농법으로 신흥성리학자들은 성리학과 중국의 강남농법을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수도작 기술을 경상도에 적용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에서 들어온 농서는 대개가 강북의 한전농법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사직설 서문에 나오는 “옛 농서와 다 같을 수 없다”고 한 부분은 바로 강남이 아닌 강북농법을 지칭하는 것이고, 경상도 사대부들이 보기엔 시대가 뒤쳐진 것이라 보고 있었죠. 결국 농사직설은 중국의 강남농법에 기초한 농서를 자신들의 손으로 다시 쓰고자 했던 것이죠. 이는 중국과 다른 자주적 농업기술이 아닌 오히려 중국의 강남 선진적인 농업기술을 따라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향약집성방>도 조선 고유의 성격이 두드러진 것이라는 측면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소위 비싼 중국의 약재를 구하기 쉽고 싼 국산 약재로 대체했다는 면이 강하게 부각되었죠. 그러나 향약집성방은 세종 26년에 나온 <의방유취>와 함께 중국의 선진적인 금과 원의 의학을 완벽하게 수용해서 정착시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자주성보다는 중국과 다른 조선의 특수성과 개별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훈민정음>은 어떨까요. 잘 알다시피 “문자”는 통치자의 지배수단 중의 하나로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됩니다. 훈민정음의 어제서문에서 중국과 다르다고 한 것은 한글 자체가 아니라 한자를 읽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에 착안을 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즉 같은 한자를 읽더라도 중국과 다르게 읽어서 한자를 읽는 방식도 표준이 없이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것이죠. 한자의 음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우리말을 정확하게 표현할 문자를 만드는 것이 절실해진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과연 하층 백성들을 위한 한글이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인 것입니다.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동국정운>이나 <용비어천가>등이 만들어진 것도 그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죠. <동국정운>의 서문을 보면, 중국과 말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서적에 한자에 적힌 성인의 도를 밝힐 수 없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소리를 창제했다는 암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프로젝트에 이어 고제(古制) 연구와 아악이 정비됩니다. 고제연구의 중심은 대개 예(禮)와 악(樂)으로 예는 인간과 신이 교접함에 있어서 합당한 위계질서의 형식을, 악은 인간과 신이 화합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음악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식에는 꼭 그에 합당한 음악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종은 왜 이러한 고제연구에 힘을 쏟을까요. 아악은 왜 정비할 까요. 그것은 바로 이상사회로 여겨지는 중국의 고대의 제도가 바로 이러한 예악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악의 정비는 봉상시 판관 박연의 상소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세종의 인식이 드러나는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바로 고제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쟁점입니다. 아악의 음 중 하나인 황종음은 자연산 검은 기장 1200개를 넣어서 만드는 율관의 소리입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건너온 율관의 음과 황해도 해주에서 생산된 기장으로 만든 율관의 소리가 다르다는 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박연은 중국과 조선의 풍기(風氣)가 다르고 산출되는 기장도 달라서 고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세종은 끝내 이를 굽히지 않습니다. 이처럼 세종은 중국 삼대의 모습을 제현하해 부심합니다. 결국 우리의 풍기와 성음이 중국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것만 빼고는 중국의 삼대 못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실현하는데 큰 저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유연하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세종시대 업적의 대부분을 자주성이라고 포장하는 부분들을 다시 들여다 보면, 유교적 보편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세종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종의 이러한 의도를 전혀 알려고 하지 않고 단지 그 성과만을 들어서 그것이 조선 역사에서 자주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위대한 업적이라는 평가만을 내렸다고 해도 지나친 평가는 아닐 것입니다. 조선은 중국의 삼대를 이상국가로 삼아 건국되었습니다. 세종대의 대부분의 가치들은 이러한 유교적 이상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종은 바로 그 자신이 요와 순임금이 되고자 노력하였으며, 조선을 중국 고대의 삼대 못지 않은 이상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아야 그의 업적이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유교적 보편성을 인정한 가운데 조선적인 특수성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출처 :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보기", <역사학보> 189.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