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법이 실패한 이유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04 Posted by 아현(我峴)
균역법이 실패한 이유

영조 50년(1750년)에 균역법(均役法)이 만들어 집니다. 말 뜻 그대로 역(役)을 균등하게(均)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 만들어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후기 군역(군대를 가야하는 의무, 혹은 일)에는 2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양역화(良役化)라고 하여 조선초기만 해도 모든 백성들(노비제외)이 담당해야 하는 의무였지만, 차츰 양반들이 빠져가면서 양인(良人)들만 지는 의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역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세화(賦稅化)의 문제로 실제로 군 복무를 하지 않고 대신에 1년에 어느정도의 돈이나 물품을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 받는 것입니다. 양인들의 입장에서는 군역 대신 세금을 납부하는 의미로 다가오게 되죠. 그래서 부세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군역문제는 조선후기 내내 해결해야 할 커다른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군역은 본래 호보제(戶保制)로 운영되었습니다. 직접 군대에 복무하는 사람을 정군(正軍) 혹은 호수(戶首)라고 하며, 이러한 정군 및 호수의 복무에 필요한 각종 경비를 부담하는 봉족(奉足) 혹은 보인(保人)으로 구성하는 이원적인 체제였습니다. 호수와 보인을 합하여 호보제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나 예전이나 같은 것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변방에서 직접 군대에 복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군사 지휘관이나 지방관에 의한 수탈도 횡횡하였습니다. 결국 직접 복무하는 정군(正軍)들의 이탈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돈주고 고용하여 대신 복무하게 하는 관행이 생기게 됩니다. 이를 대립(代立) 혹은 고립(雇立)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현상이 보편화 하게 되자, 중종 36년(1541년)에 군적수포법(軍籍收布法)을 마련하여 병보소속 보병에 한하여 군 복무 대신 포(布)를 거두는 방식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게 됩니다. 균역법의 시초라고 할 수 있죠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전기의 병농일치제(농민이 곧 군인이 되는 제도)에서 직업군인을 양성하게 됩니다. 최초는 훈련도감이라 할 수 있죠. 또한 인조반정으로 등장하는 서인 정권의 군영 또한 새롭게 증설이 되고, 숙종초반 금위영을 마지막으로 5군영 체제가 완성됩니다. 본래는 고용에 의한 직업군인이지만, 그들에게 지급해야 할 재원마련에 고심을 하게 되고, 그것조차 해결하지 못하게 되자, 서울 인근의 속오군을 끌어들여 5군영의 군사들을 채우기 시작합니다. 속오군은 본래 임란 이후에 지방의 노비로 구성된 지방부대였는데, 5군영이 고용병 체제로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결국엔 지방군을 이용하여 5군영의 체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결국 5군영은 조선후기에 등장한 직업군인체제와 조선전기의 병농일치제가 결합된 형태로 가게 됩니다. 즉 5군영의 고용병체제라 하더라도 속오군이 섞인 결과 부세화, 양역화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군역의 이와같은 폐단은 결국 속종대의 여러 논의를 거쳐서 영조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라고 합니다. 이는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소변통론에서는 종래의 양역제도 범위 안에서 이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도망간 사람을 끝까지 찾아내서 군대에 충당한다던가, 양역제의 제도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제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갑니다. 한편 대변통론에서는 사람대신 가호(家戶)를 단위로 하여 돈을 거두자는 호포론(戶布論), 남녀 모두에서 일정량의 돈을 거두자는 구전론(口錢論), 양반과 유생에게도 징수하자는 유포론(遊布論), 부과대상을 토지로 옮겨 서두자는 결전론(結錢論) 등의 4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변통론의 경우에는 양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아 쉽게 결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논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숙종 말경에 당시에 1년에 2필이던 양역을 반으로 줄여보자는 감필론(減疋論)이 대두하게 됩니다. 감필론은 양역민의 현실적인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도망가는 폐단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영조대에 들어오자 감필론이 중심이 되어 논의가 전개되는 가운데 두 차례나 대궐 밖에 나아가 인민들에게 호포제의 실시의 여부에 대해 의견을 묻자, 일반 민인들은 호포제가 좋다고 했지만, 관료나 양반들은 모두 호포제를 반대하였습니다. 사족층의 반발을 무릎쓰고 호조제를 실시할 것인지에 대해 영조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영조는 호포제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1750년에 일방적으로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감필의 명령을 내립니다. 대신 그만큼 줄어든 재원은 지방세였던 어염세(어선세와 소금세), 선무군관포 징수, 1결당 결미 2두 징수(토지세)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균역법을 마련하게 됩니다. 양역변통을 논의한지 거의 100년 만에 나온 결실입니다.

그러나 균역법은 실패한 미봉책에 불과하였습니다. 다름은 균역법에 대한 사신의 평가입니다.

균역법은 동쪽을 떼어다 서쪽을 보탠 것이며, 근본적인 것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만을 취한 것이다. 개혁의 이름은 있지만 개혁의 실속은 없다(<영조실록> 권 71, 영조26년 7월1일)

균역법 실시 이후 헐역(쉬운 역이나, 역가가 저렴한 역)으로의 투속이 증가합니다. 균역법은 1필이었지만, 1필 이하의 다른 역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증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금위영 군대에서는 1필을 받지만, 강원도감영군에 있으면 0.5필을 받는다고 하면 당연히 금위영이 아닌 강원도감영군에 들어가겠죠. 이렇게 1필 이하의 헐역이 대거 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국가 재정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출은 늘어나지만 수입은 전혀 늘어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농민의 부담만 줄여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농민의 입장에서는 돈을 적게 내서 좋지만, 국가의 입장에서는 결국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가진 세력을 지는 기득권을 포함한 개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균역은 역을 고르게 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양인들만 그렇지 양반을 포함하지 않습니다. 대원군대에 이루어진 호포제도 결국 이와 같은 연장 선상에 있었습니다. 대원군의 개혁 중 하나로 손을 꼽는 호포제도 이미 150여년전에 숙종대에 이미 논의되었던 제도 개혁 중 하나에 불과했으니까요. 개혁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고, 그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출처 : 김우철, "균역법은 왜 성공하지 못했나", <내일을 여는 역사> 8, 2002.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