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지방사회 통치

사료(史料)/조선시대 2010. 1. 26. 12:54 Posted by 아현(我峴)
조선의 지방사회 통치

여말선초에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커를 잡아갔다. 고려시대 개성이나 조선시대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사람들이 낙향을 하면서 지방에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조선전기 전국적인 농장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병작제의 문제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여말선초의 개발은 주로 하천 주변에서 시작되었다. 농법의 발전으로 논농사가 용이해지자 용수확보가 쉬운 계곡의 하천이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배산임수형태의 주거지 선호는 대개 이때부터 진행이 되었다. 그리고 세대가 흐름에 따라 자손들이 불어났고 계곡 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 까지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동, 촌, 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친족이 함께 거주하게 되면서 동을 단위로 하여 동계(洞契)가 시행되었다. 동계는 동원(洞員) 상호간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주로 봄가을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경조사에 들어갈 비용을 부조하는 것으로 오늘날 친척들의 계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음은 경상도 예안현의 온계에서 시행된 동계의 한 예이다.

① 혼인, 과명(科名)에는 백미 5되, 닭과 꿩 중 1마리씩 수합한다.
② 부모, 처자, 본인이 상을 당했을 때, 백미 5되, 상지(常紙) 1권을 수합한다. 각각 장정 2명을 내어 2일씩 부역한다. 가마니 3개, 새끼 40파, 덮개풀 20파씩을 수합한다.
③ 매년 답청과 중구일마다 강회를 연다
④ 술은 백미 각 5되와 고기값 2말씩을 수합하여 집에서 빚어 준비한다.

동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유교규범과 지역 공동체에서 지켜야 할 사회 규범을 마련하여 마을의 질서와 공동 이익을 추구하려고 했다. 자신만의 이익은 마을 공동의 이익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개인의 사직 이익을 규제하고 동 전체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다음은 16세기 말 예안현 부포동에서 시행된 동계 중 일부이다.

① 밭두둑을 차지하여 경작하지 않는다.
② 곡방(曲防)에 도랑을 내지 않는다.
③ 경작이 금지된 산림을 벌목하지 않는다.

양반들은 당시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노비를 많이 거느리고 있어서 노비들을 통제하는 것 또한 큰 관심거리였다. 이에 양반들은 동계 안에 노비에 대한 통제 조항을 포함하여 마을 공통의 관심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반할 시에는 태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예안현 온계에서 노비에게 시행된 동령(洞令)의 일부이다.

① 본주와 다른 주인에게 무례하고 불손한 자는 태 50
②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는 태 50
③ 구타하여 상해를 입한 자는 태 50
④ 묘산(墓山)에 불을 놓아 밭을 만든 자는 태 50
⑤ 소와 말을 방목하는 자는 태 50

여러 지역에 걸쳐 있는 양반들의 상호 결속을 통해 고을 단위의 자치조직이 꾸려져 갔다. 그 기초가 향안이다. 향안은 한 고을의 유력한 양반들의 명단이다. 본래 조선의 각 고을에는 유향소(留鄕所)라는 기구를 두고 양반이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들을 규찰했다. 유향소에는 좌수와 별감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향안은 본래 이 직책의 후보자 명단이었다. 이 향안의 의미가 확대되어 양반의 명부가 된 것이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다는 것은 그 지역의 귄위와 권력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향안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우선 양반 신분에 하자가 없어야 한다. 부모는 물론 처향도 모두 양반 출신이어야 하며, 절대 서얼의 자손이 끼어서는 안되었다. 또한 부모와 처가 모두 그 지역 출신이어야 했다. 이를 부향, 모향, 처향이라 했다. 3향 중에서 1향이라고 들어갈 수는 있었으나 더욱 엄격한 조건이 요구되었다. 다음은 안동의 향안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들이다.

① 서얼은 허통(許通)하여 신분을 세탁하더라도 반드시 4~5세대에 걸쳐 청족(淸族)과 혼인을 한 후에야 향안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② 향리와 혈연, 혼인 관계가 있는자는 반드시 4~5세대 동안 한사람 한사람이 청족과 혼인한 연후에야 향안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③ 다른 지방 출신으로 본부에 장가든 자와 본부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 장가든 자는 뛰어난 문벌로 사람들이 다 아는 자가 아니면 향안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향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고을의 기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약과 조직을 만들었는데 바로 향약이다. 향약 조문에는 향안 입록 자격과 절차, 향약의 임원 선임, 향회의 운영들에 대한 실무적인 내용부터 윤리규범, 사회규범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다양했다. 향약은 동을 단위로 한 동계가 고을단위로 확대된 것이라 보면 된다.

처음에는 양반들 사이의 약속으로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반 평민도 참여시켜서 그 규범을 준수하게 했다. 양반과 평민이 참여하는 향약에는 양반들을 위한 약조와 비양반들인 하인들을 위한 약조가 따로 마련되었다. 이는 상하귀천의 명분을 내세워 생활태도를 규제함으로써 신분질서와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양반들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다음은 이황이 초안을 잡았던 예안현 향약이다.

* 극벌(極罰)
-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
- 형제 간에 서로 싸우는자 : 형이 잘못하고 동생이 옳으면 똑같이 벌한다. 형이 옳고 동생이 잘못했으면 동생만 벌한다. 잘잘못이 마찬가지면 형은 가볍게 동생은 무겁게 벌한다.
- 가도(家道)가 어지러운 자 : 정처를 쫓아낸 자, 남녀의 분별이 없는 자, 정처와 첩에 대한 대우가 뒤바뀐 자. 첩을 처로 삼은 자, 서얼을 적자로 삼은 자, 적자가 서얼을 돌보지 않는 자, 서얼이 적자를 능욕한 자
- 고을 어른을 욕보인 자
- 수절하는 과부를 꾀어내 간음하는 자
* 중벌(中罰)
- 정처를 소박하는 자
-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양반의 기풍을 더럽히는 자
- 세력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침탈하고 소송을 일으키는 자
- 빈말을 날조하여 남을 모함하는 자
- 남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이 미치면서도 좌시하고 구하지 않는 자
- 혼인과 장례, 제사 때 이유 없이 때를 넘기는 자

다음은 경상도 현풍현의 향약 중 하인약조(下人約條)이다.

* 양반을 욕보이는 자
* 사립(絲笠)과 세의(細衣)를 착용하여 명기(名器)를 어지럽히는 자
* 양반과 나란히 말을 타는 자
* 생산에 힘쓰지 않고 농사일을 게을리 하며 노는 자
* 여인이 시부모에게 욕을 하는 자
* 유녀(遊女)와 간음하고 난장(亂場)을 만드는 자
* 마을에서 고성을 지르며 욕하는 자
* 모임 때 주사를 부리며 시끄럽게 싸우는 자

향회에서는 고을에서 물의를 일으킨 자에 대한 처벌을 시행했다. 반드시 향약에 명시된 조항 말고도 윤리적으로 패악한 경우와 사익(私益)에 눈이 먼 경우도 향중의 공론에 따라서 처벌이 가능했다. 이를 향벌(鄕罰)이라고 한다. 향약은 대개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의 4 조목으로 구성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중국 북종때 여씨 형제의 향약의 내용이다. 조선의 향약은 중국의 여씨향약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개 조선의 향약은 향벌을 중시했다.

양반과 비양반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용된 최고의 벌은 출향(출향)이었다. 출향은 고향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심하면 집도 부수고 쫓아냈다. 이를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 한다. 출향은 고향주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훼가출향은 선조 때 진주 유생들이 간통했다고 지목된 이씨의 집을 부순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 벌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국가에서는 이를 법으로 금지하였으나 쉽지는 않았다. 다음은 실록에 보이는 훼가출향에 대한 기사이다.

진주의 故 진사 하종악의 후처가 홀로 살았는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자자하였다. 처사 조식이 우연히 그 일을 자기 문인인 정인홍, 하항 등과 말하게 되었는데....하항 등은 옥사가 성립되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긴 친구들을 데리고 하씨의 집을 헐어버렸다.(<선조수정실록> 권3 2년 5월 1일(갑진))

이 형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양반과 비양반의 처벌이 달랐다. 양반은 향안에서 이름을 지워 향원의 자격을 박탈하거나 향원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등의 가벼운 처벌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벌주(罰酒)로 처벌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양반의 경우에는 태벌만 있었다.

물론 조선사회가 정착되면서 양반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역사회의 구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처음에는 양반들만의 조직과 규례를 제정하였지만, 이후에는 점차 농민과 노비들도 이에 포함을 시켰다. 양반들의 지배구조 속에 농민들과 노비들이 포섭된 것이 결국 향약의 시행으로 나타났다. 포섭의 결과는 강고했다. 결국 상과 벌로 이루어진 지역사회의 지배구조는 조선의 지방사회를 지탱해 나간 기본 골격이었다.

출처 : 박현순, "벌과 상으로 지방사회를 통치한 향약",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조선 양반의 일생>, 글항아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