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출신군관의 부방생활

사편(史片)/조선시대 2009. 5. 19. 00:17 Posted by 아현(我峴)
17세기 출신군관의 부방생활

부북일기(赴北日記)는 군관이 함경도에 근무하면서 쓸 생활일기입니다. 그들이 겪었을 변방지역에서의 군대생활에 대한 느낌을 어느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위 일기는 40년을 시차로 아버지와 아들이 기록한 것으로 아버지의 일기는 선조38년(1605)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하여 1년간 함경도 회령부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는 선조40년 1월 1일까지의 일기이고, 아들의 일기는 인조22년(1644)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하여 1년간 함경도 회령부와 경성의 병영에서 부방생활을 마치고 집에 도착한 인조 24년 4월 4일까지의 일기입니다.

* 부방(赴防) : 변지 등에 가서 군 복무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출신군관의 부방 행로의 공식적인 출발은 거주지 도의 병사로부터 받는 점고에서 시작합니다. 군관들은 특정장소에 모여 점고를 받은 후에 목적지 병영을 향해 출발하고 목적지 병영에서 도착하여 최종점고를 박고 근무지를 배정받았습니다. 아버지의 경우 영천에서 경상도병사로부터 점고를 받고 조령을 거쳐 서울에서 10일을 머물고 함흥과 경성을 거쳐 동절기에 북병사가 머물던 행영(行營)까지 가서 최종 점고를 받고 여기서 북병사로부터 보을하진의 근무를 명받았습니다. 울산에서 출발한지 총 70여일이 걸린 셈입니다. 아들의 경우에는 울산에서 출발하여 의성에서 우후(虞侯)로부터 점고를 받고 청송과 진보를 거쳐 동해안에 다다른 후에는 해안의 육로를 따라 북상하여 함흥에서 관찰사로부터 점고를 받고 행영에 도착하여 북병사에게서 최종 점고를 받았습니다. 북병사로부터 회령부의 근무를 지정받았습니다. 아들도 역시 70여일이 소요된 셈입니다. 그러나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올때는 40여일이 걸렸는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대 때문으로 보입니다.

본래 군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신군관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일정 기간에 한시적으로 복무하는 부류가 있고, 다른 하나는 토착군관으로 이들은 그 지역에 토착한 자로 군관에 선발되어 복무하는 부류입니다. 그래서 신출이 출신군관은 대개 양반들이었음에 비해 토착군관들은 양반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출신군관과 토착군관 사이에는 마찰의 소지가 있었고, 실제 미묘한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상관 수령들이 모두 양반이었기 때문에 군관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많은 차이를 드러냅니다.

출신군관의 업무는 대개 2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정식 직책을 맡아 일정기간 지속적으로 업무를 관장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한시적이고 일회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인데, 순찰이나 상관을 배종하는 업무 등이 있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병방군관(兵房軍官)이 되어 병방의 일을 수행한다거나 공방감관(工房監官)이 되어 공방의 일을 책임지는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아들의 경우에 회령에서 근무할 때 기와만드는 일을 책임지고 2달에 걸쳐서 마무리 지은 경우가 있으며, 경성의 병영으로 전근하였을 때도 공방감관이 되어 수개월동안 일을 수행하고, 경성에서 조총 제조의 감독관까지 맡았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북병사의 남순(南巡)시에 남쪽지역을 순찰하거나 다른 군진의 군기를 검열하기도 했습니다. 즉 출신군관들은 대개 특정 고유한 업무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업무를 부여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출신군관 중 일부는 상관의 명령으로 부정한 일에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리시험 답안을 작성해주는 부정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따라 반대급부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후일 관직 진출시에 부방기일이 복무기일에 포함되어 경력으로 계산되거나, 경제적으로 부방기간동안 각종 세금과 부역을 줄여주고 급료도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관직에 진출하기 전에 변방의 근무를 익히는 실습의 기회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관직에 제수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기회였습니다. 일기에는 다른 이들이 관직에 가는 경우가 보여지는데, 선전관이나 수문장, 부장으로 제수되는 사례들이 나타납니다.

병영에서 가장 중요한 훈련은 습진(習陣)이었습니다. 이는 보통 1년에 4차례 행해지는데 2월에 두 번, 9월에 2번 진행되었습니다. 평상시에 병영을 긴장시킨 것은 상급부서의 순찰이었습니다. 순찰의 횟수를 보면 동절기에 집중되는데, 강이 얼어서 적이 넘어오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입니다. 일기에서 보이는 병영생활 중 가장 많이 나오는 내용은 활쏘기입니다. 군관의 경우 거의 매일 활쏘기를 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기를 보면 부자가 모두 명사수였던 것 같습니다. 활쏘기 시합에서 종종 1등을 하여 상을 타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꼴찌에 대한 벌칙도 나오는데, 시합에 지면 곤장을 맞거나 광대 옷을 입혀 절하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하여 회롱하기도 했습니다.

출신군관의 일상생활은 어떠했을까요. 아들의 일기에는 부방길에 동침한 여인들의 인적사항과 이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천민들로서 대개 기생, 숙박한 집의 가비(家婢), 주막의 주탕(酒湯)등이었습니다. 보통 남녀 사이의 내밀한 문제는 숨기려는 것이 상정이지만, 그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로 간주되었던 듯합니다. 군관들이 부방생활을 하게 되면 방지기(房直妓)가 정해졌습니다. 외지에서 온 군관들에게는 대개 한명의 방지기가 배정해 주었는데 그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도록 하였으며 방직은 일종의 소위 ‘현지첩’인 셈이었습니다. 군관들의 방지기는 주로 기생이나 사비(私婢) 중에서 충당되었습니다. 아들에게는 ‘의향’이라는 방지기가 있었습니다. 의향은 회령부 읍내에 살고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조금 떨어진 촌가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주 의향의 집에 왕래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플 때는 병문안을 오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방지기는 한시적인 첩의 존재와도 같아서 객지 생활의 여러 가지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군관과 방지기의 관계는 군관이 떠나면 자연 해소되는 한시적인 관계였는데 방지기는 당해 군현에 소속된 존재여서 관내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회령에서 경성병영으로 옮길때도 경성에서 새로운 방지기는 배정받았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일기에는 여러 사람과 각종 선물을 주고 받는 기사가 나옵니다. 여러 상관에게서 선물을 받거나 동료에게서 수수되는 부분도 많지만, 받은 선물은 대개 집에 보내지거나 아니면 친하게 지내던 기생들과 방지기에게 주어졌습니다. 또한 크고 잔치가 열리기도 했는데, 대개 시를 짓기보다는 창가(唱歌)가 흥을 돋구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들의 경우 부사가 운을 띄었으나 본인만이 시를 지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가야금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출처 : 우인수, "부북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군관의 부방생활", <한국사연구> 96, 1997.

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