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발해인식

사편(史片)/고대사 2009. 5. 19. 00:09 Posted by 아현(我峴)
최치원의 발해인식

"고구려도 신라도 다 같이 우리 한민족이었다"거나,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였다"고 하여 결국에는 발해와 신라가 같은 한민족이었다는 인식을 넌지시 암시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소위 국사교과서에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남북한과 같이 그러한 민족적 동질성에 대한 인식을 그렇게 쉽게 결론지어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어 보이는 듯합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는 제쳐두고라도, 같은 시기에 존재하던 발해와 신라에 대한 서로간의 인식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는 듯합니다.(아직 제 공부가 짧아 그리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연구 결과를 알고 계신 분이 있으시면 토론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실제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직접 보여주는 사료는 거의 안나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교류도 거의 없었다고 보아야 맞는 설명이겠죠. 유일하게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한반도가 아닌 당나라에서였습니다. 당에서는 발해와 신라의 유학생들이 많이 몰려와 자신들의 나라에 대한 자존심 대결이 글을 통해서 유감없이 발휘가 됩니다. 다음은 동문선에 실린 최치원의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중의 일부입니다.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그때 고구려의 유신(遺燼)으로 물길(勿吉-말갈)의 잡류(雜流)인 효음(梟音)은 백산(白山)에 소취(嘯聚)하고, 치의(鴟義)는 흑수(黑水)에 훤장(喧張)하여 처음은 거란(契丹)과 행악(行惡)하고, 이어 돌궐과 통모(通謀)하여 만리 벌판에 곡식을 경작하면서 여러번 요수(遼水)를 건너는 수레를 항거했으며, 10년이나 오디를 먹다가 늦게야 한(漢) 나라에 항복하는 기(旗)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처음 거처할 고을을 세우자 와서 인접(隣接)을 청하기에 그 추장(酋長) 대조영에게 비로소 신번(臣蕃)의 제5품(品) 벼슬인 대아찬(大阿餐)을 주었더니, 뒤에 선천(先天) 2년에 이르러 바야흐로 대조(大朝)의 총명(寵命)을 받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封)해졌나이다."

발해는 본래 "사마귀"만한 부락으로 "말갈"의 족속이라 폄하하는 대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대조영은 "추장"으로 격하되었죠. "효음"은 말이 어려운데 올빼미라는 말로,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올빼미라고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위의 표현은 민족문화추진회 번역본인데 정말 어렵게 번역해 놓았네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참 알기 힘드네요. 아무튼, 최치원이 이 글을 쓴 이유는 잘 아시겠지만, 발해인이 신라인보다 윗 자리를 차지하게 되자, 왜 신라인이 발해인보다 못하냐면서 다시 신라인이 발해인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에 감사하는 글이죠. 단순히 생각해 봐도 과연 최치원이 발해인을 같은 계통이라고 생각했을지 의문이 많이 듭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발해를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국이라는 표현도 사용하지만, 북적(北狄)이라고 하여 "북쪽 오랑캐"라고 하는 용어도 나옵니다. 신라가 보기에 발해는 문명의 바깥에 존재하는 오랑캐로 비추어졌다는 의미인데, 아무튼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깔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듯합니다. 발해의 유학생이 신라의 유학생보다 시험성적이 더 높게 나오자 이를 "신라의 부끄러움"이라고 한 것에서 경쟁의 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동류의식은 아니죠.

신라와 발해를 남북조가 아닌 서로가 다른 이질적인 경쟁국가로 인식하는 것이 굳이 나쁜 역사 인식일까요? 발해의 문화는 신라와 많이 달라도, 발해와 가까운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후대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고 생각한다면 발해의 역사성이 더 부각되지 않을까요?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역사적 상상력을 저해하는 요소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문헌 - 박노자, "신라는 발해를 동족으로 생각했나", <한겨레21> 제704호, 2008.4.

아현